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대헌장’이라고 불립니다. 지금은 터무니없지만 인류역사의 아주 오랜 시간동안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혈통적으로, 또 어떤 이는 전쟁으로, 또 누군가는 가난으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로 지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도 불과 몇 년 전에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겨 노예처럼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를 빼앗긴 이들 모두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자유였습니다. 노예제도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지금의 우리에겐 낯설겠지만 초대교회 시절 우리 모두가 범죄함으로 죄악의 노예가 되어 사망이라는 족쇄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사도들을 외침은 분명 그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묶고 있던 죄악의 사슬을 끊어버림으로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복음의 선포는 마치 숨죽여 살다 광복의 소식을 듣고 온 거리에 뛰쳐나와 기쁨의 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감격과도 같이 들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죄악의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변화를 누리게 된 이들에게 다시는 종의 자리로 돌아가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성경의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누가 다시 노예가 되길 원하겠으며 어떤 댓가(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를 치루고 얻은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유를 얻은 우리 스스로가 종의 자리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바로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이제껏 자유가 없는 상태로 굴종하는 노예였다면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사랑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사랑이란 참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손해가 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없는 세상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터무니없는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보좌의 자리에서 낮고 낮은 구유로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습으로 거룩한 심판자가 죄인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섬김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짐승의 피로 세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세우신 새 계명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함을 얻은 우리에겐 예수님이 마치 우리의 종인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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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우리에게 사랑 없음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돈과 자기 사랑에 빠진 이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우리 스스로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사랑을 자신의 의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랑에서 거리가 멀어집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놀랍게도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은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를 설명하고 그 은사를 받도록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거짓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로서 그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새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기쁨을 누리는 그 분의 벗이 될 것입니다.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