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우리를 나무에 비유하기를 참 좋아하십니다. 시편1편의 시냇가의 심은 나무, 요한복음의 포도나우와 가지 비유, 이사야서의 극상품 포도나무 비유 등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로 표현하십니다. 그 중에 한 가지 마태복음에는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는 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아무리 그럴싸한 예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혹은 참 선지자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전하더라도 이 두 선지자가 전한 말씀이 과연 제대로 응하는지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파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좋은 나무인가요? 나쁜 나무인가요? 그 답은 우리는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싸 해보이는 사람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타락했고 죄의 열매만을 맺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본질 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착각합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지금 보다 조금 더 나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답변은 “아니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질이 바뀔 때 가능합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나무가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한 밤 중에 찾아간 율법학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관점에선 결코 성령으로 거듭남(은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이성으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우리가 이전에 맺으려고 했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좋고 나쁜 나무, 열매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좋게 여기는 것을 맺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맺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 보시기엔 과연 좋은 것일까요? 북한을 다녀온 목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이 같은 말, 같은 단어를 쓰는데 묘하게 의미가 달라서 무서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가 우리가 말하는 공평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평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똑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맺으려고 했던 좋은 열매와 거듭 나고 난 뒤에 맺으려고 하는 열매는 같은 말로 불리어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령의 9가지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은,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처음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맺어야 할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혹시 여전히 예전에 맺으려고 했던 동음이어의 열매들을 아직도 맺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면 빨리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이젠 우리는 그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슬러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 집중합시다. 가을이 다가옵니다. 결실의 계절, 하나님께 풍성한 열매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됩시다.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