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죄 많은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으로 초대받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감히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 집에 초대받은 손님인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젖시고 준비해온 향유를 꺼내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예배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놀라운 일을 벌인 여인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전부인 옥합을 예수님께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 여인은 초대받지 않은 이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초대한 이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의 관습에 집 주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간 손님은 그 집의 가족과 같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손님을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만난다는 것은 주인과 손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이 여인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당시 의인의 대표인 바리새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인의 대표인 바리새인이 의로우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죄지은 여인이 심지어 예수님의 “그의 많은 죄” 결코 가볍지 않은 죄를 지은 여인이 그 의로운 자리에 나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심한 모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심할 경우 정결법에 따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집 주인과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겨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의 무시받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손님이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 안타까운 상황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예수님께 손님이 받아야 할 대우를 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향유옥합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집 주인이 주인노릇을 하지 않고 있자 다른 이가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치 이제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 드리기 위해 이곳 교회와 왔습니다. 그런데 예배 드리기 위한 이 곳에 온 우리가 때로는예수님을 외면하고 그저 한 구석에 앉게하고 그저 방치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초대는 했지만 방치하고 방관하는 것이죠. 주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오늘 이곳에서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릴 자가 바로 우리여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 나올 때 우리를 가로막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과연 예배드릴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실패하고 문제투성이에다 내 삶은 도저히 내세울만한 어떤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이들은 다 나름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문제없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문제투성이의 삶을 사는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의구심과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멈춰버립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 죄많은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주님은 이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는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탕자가 자신의 실패한 인생에 짓눌려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자신을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을 본 바리새인은 죄인이 의인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 정결법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이 여자가 죄인임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에게 나온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녀가 주님께 행하는 그 행함 속에 자신을 향한 얼마나 깊은 헌신과 사랑이 담겨있는지 말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리가 아직 멀지만 아버지가 한 눈에 아들을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현 주소가 어떠하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예배의 자리에 여러분은 나왔습니다. 주님을 저 멀리에 두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가 주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그 경배를 드립시다. 우리의 지금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