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참혹한 십자가는 원래 우리를 위해 예비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사람은 아마 예수님 대신에 풀려난 강도 바라바일 것입니다.
바라바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성경에서 알 수 있는 몇가지 사실은 그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로마의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잡힌 사형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라바가 빌라도의 암살도 시도하였다고 봅니다. 이처럼 바라바는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의 눈에는 아주 위험하고 불량하며 범법사실이 분명한 죄인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셈법이 빠르고 민심을 잘 이용하던 빌라도에겐 바라바는 로마에 대한 자신의 충성과 식민지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좋은 예였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바는 꼼짝없이 십자가형만을 기다려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누구보다도 바라바가 죄인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합당한 죄인을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풀어줍니다. 빌라도 자신도 당황스러운 전개였기에 몇 번이나 만류를 해 보지만 성난 민심에 밀려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바라바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라바가 자신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이 달린 일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어 자신은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여기에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아주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재력이나, 그 어떠한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절대적인 은혜!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셨고 사랑하셨고 용서하셨고 구속하셨습니다.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그가 이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그저 운이 좋아서 풀려났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빚이 없습니다. 원래 자신이 죽을 죄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풀어주셨다고 착각한다면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죽다 살아난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바라바는 자기 대신에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알아보게 되고 그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예수님을 믿고 진정한 구원을 얻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바라바의 뒷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바라바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생명을 대신 주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자도 있을 수 있고, 어떤 이는 놀라운 사랑이 펼쳐졌음에도 믿지 않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라바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교회 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라바는 이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끝가지 믿음을 지키고 로마에 의해 순교하는 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바라바는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처럼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사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놀라운 은혜가 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그저 선물로 펼쳐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생명을 선물로 주신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